바둑기사

이창호 : 바둑계의 살아있는 전설. 그에 대해 알아보자.

사람인물배우 2025. 5. 10.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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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호(李昌鎬, Lee Chang-ho)는 대한민국의 바둑기사로, 1975년 7월 29일 전라북도 전주시 중앙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 이씨이며, 혈액형은 A형이다. 학력은 전주교육대학교전주부설초등학교에서 시작해, 이화여자대학교사범대학부속초등학교를 거쳐 충암초등학교, 충암중학교, 충암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병역은 예술체육요원으로 대체 복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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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 기사로서의 경력


이창호는 1986년에 입단하여 현재 프로 9단이며, 한국기원 소속이다. ‘신산(神算)’이라는 칭호로도 불리는 그는 16세 반의 나이에 제3회 동양증권배에서 최연소 국제 바둑 기전 우승 기록을 세웠다. 누적 우승 횟수는 141회로, 한국 바둑기사 중 두 번째로 많은 우승 기록을 가지고 있다. 최근 2024년 쏘팔코사놀 레전드리그에 수소도시 완주 1지명으로 출전하였다.

가족 및 기타 정보


이창호의 가족은 어머니 채수희, 아버지 이재룡, 형 이광호, 남동생 이영호가 있으며, 배우자는 이도윤이고 두 딸 이소정과 이시연이 있다. 타이젬바둑에서 사용하는 닉네임은 swing(P), 내안의 神이다.

이창호

[칼럼] 바둑의 신, 이창호 – 돌부처가 바꾼 세계 바둑의 지형도

 

"다른 한국 기사를 모두 꺾어도 이창호가 남아있다면, 그때부터 시작이다." – 창하오 9단의 이 말은 단순한 찬사가 아니다. 그것은 한 시대를 정의한 바둑기사, 이창호의 실체를 가장 정확하게 표현한 문장이다. 그의 존재는 바둑계의 중력장 그 자체였다. 수많은 천재들이 그를 넘기 위해 모이고 부서지고 다시 일어섰다. 이창호는 그 모두의 중심에서 침묵하며 한 수 한 수를 쌓아올렸다.

이창호 9단. 그는 단순한 챔피언이 아니었다. 그의 별명은 ‘석불(石佛)’, 돌부처였다. 표정 없는 얼굴, 감정 없이 두는 바둑. 그러나 그 무표정 너머에는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정교한 계산과 최적화가 있었다. 이창호의 바둑은 한 치의 흔들림 없는 형세 판단과 끝내기에서 빛을 발했다. 그리고 그것은 바둑의 메타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1988년, 겨우 13세였던 이창호는 연간 승률 88.24%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세웠다. 이후에도 그는 국내외 기전을 휩쓸며 17회의 메이저 세계대회 우승, 21회의 세계대회 통산 우승, 1897승이라는 통산 기록을 남긴다. 세계 최연소 종합기전 타이틀, 세계 최연소 세계기전 우승, 최연소 500승·1000승·1500승 등은 이제 숫자로는 다 담을 수 없는 그의 발자취가 되었다. 가장 전설적인 1998년에는 세계 메이저 전 대회의 결승에 진출했고, 그중 네 개를 우승했다. 이창호는 그 누구보다 빨리 정상에 도달했고, 그 정상에서 누구보다 오래 머물렀다.

그러나 진짜 이창호의 위대함은 단지 ‘이긴 횟수’에 있지 않다. 그는 바둑의 근본을 바꾸었다. 포석의 오청원이 있었다면, 끝내기의 이창호가 있었다. 바둑의 승부는 더 이상 초반 전투나 묘수풀이에서 결정되지 않았다. 형세 판단, 계산, 끝내기. 이창호는 ‘계산 바둑’이라는 개념을 실전으로 체현한 첫 번째 인물이었다. 상대가 승기를 잡았다고 확신한 순간, 이창호의 미세한 끝내기는 0.5집 차이의 역전을 만들어냈다. 묘수 세 번을 두면 진다는 바둑의 격언. 이창호는 그 세 번의 묘수를 마지막 50수 안에서 완성했다. 그리고 그 순간까지 상대는 자신이 이기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들었다.

그는 바둑계의 아인슈타인이었다. 오청원이 뉴턴이라면, 이창호는 그 복잡한 세계를 다시 조율한 상대성이론의 창시자였다. 혼인보 도사쿠가 포석을 창시하고, 오청원이 신포석으로 일본 바둑을 엎었다면, 이창호는 끝내기로 세계 바둑의 ‘게임의 룰’을 바꿨다. 이후 세대는 그의 시스템을 기준으로 자신의 실력을 측정해야 했다. 그에게 이긴다는 것은 그의 프레임 안에서 더 나은 계산을 해야 한다는 뜻이었고, 그런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이창호는 단지 강한 기사가 아니라, 시대 그 자체였다. 그는 '개성의 시대'를 '정교함의 시대'로 바꾸었다. 손오공, 제비, 우주류 같은 별명들이 사라지고, 대신 수치와 형세, 실리와 끝내기가 바둑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창호는 바둑의 주관을 배제하고, 완전한 논리와 최적화의 길을 열었다.

그의 성장 과정도 이 전설에 힘을 더한다. 10살에 조훈현의 내제자가 되었고, 11살에 프로 입단, 13살에 타이틀 획득. 처음 조훈현은 이창호의 성장 속도가 다소 느리다며 천재성을 의심했으나, 시간이 지나며 “창호는 진짜 천재였다”는 찬탄으로 바뀌었다. 조훈현과의 사제 대결은 10년에 걸쳐 이어졌고, 결국 사제지간의 권력 교체를 이뤄낸 유일한 사례로 남았다.

 

그의 천재성은 드러나지 않았다. 묘수를 남발하지 않았고, 상대의 의표를 찌르지도 않았다. 그는 전투에서 이기기보다, 전쟁에서 이겼다. 처음부터 끝까지 상대가 틀리길 기다리며, 조금씩 이득을 쌓고, 판이 끝난 후에야 상대가 진 것을 알게 만드는 기사. 그는 바둑을 가장 인간답지 않게 두었기에, 인간의 한계를 가장 완벽하게 초월한 기사가 되었다.

바둑은 천재가 피나는 노력을 더할 때 비로소 위대한 기사가 탄생한다. 이세돌은 천재형이었지만, 이창호는 천재 그 자체였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고집과 침묵의 결합은, 전 세계 바둑사를 다시 쓰는 ‘돌부처 신화’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세계의 어떤 기사든 그의 궤적 위에서 출발하고 있다. AI 시대의 기사들조차, 형세판단과 끝내기의 정수는 그가 남긴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창호는 여전히 살아 있는 전설이다. 더 이상 타이틀이 없더라도, 그의 시대는 끝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창호는 기록으로 기억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패러다임으로, 메타로, 시스템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그런 기사는, 바둑 역사에 단 두 명뿐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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