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기사

조훈현 : 바둑계의 전설. 그에 대해 알아보자.

사람인물배우 2025. 5. 10.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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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훈현은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바둑 기사이자 정치인으로, 1953년 4월 23일 전라남도 영암군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비범한 바둑 실력을 보였고, 1962년 한국기원에 입단하며 본격적인 프로기사의 길에 들어섰다. 이후 1966년 일본기원에도 입단하면서 국제적인 활동 무대를 넓혔다. 본관은 창녕 조씨이며, A형 혈액형을 가진 그는 서울삼선국민학교와 일본 신메이중학교를 졸업한 뒤, 목포대학교로부터 체육학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병역은 공군 제15특수임무비행단에서 병장으로 만기 전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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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신(戰神)’이라는 별명을 지닌 조훈현은 바둑계에서 독보적인 업적을 남겼다. 통산 161회 우승을 기록하며 한국 바둑기사 중 최다 우승자 자리에 올라섰고, 세계 바둑계 최초로 전관왕을 달성한 인물이기도 하다. 또한 세계 최초로 국제기전 그랜드슬램을 달성했고, 바둑기사 최다 연속우승 기록까지 보유하고 있다. 이 같은 전설적인 업적들 덕분에 그는 바둑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자리매김했다.

조훈현

 

정치에 입문한 조훈현은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누리당 비례대표로 당선되며 국회에 입성했다. 바둑이라는 전문 분야에서 평생을 바친 그였지만, 국민과 사회에 더 넓은 기여를 하기 위해 정치인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현재는 무소속으로 활동 중이며, SNS와 블로그 등을 통해 대중과 꾸준히 소통하고 있다. 가족으로는 아내 정미화 씨와 아들, 딸 두 명이 있으며, 바둑과 정치, 두 영역에서 모두 의미 있는 족적을 남긴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조훈현: 바둑의 신화를 쓴 거장, 정치의 무대로 나아간 승부사

 

대한민국 바둑사에서 조훈현의 이름은 전설 그 자체다. 한 사람의 인생이 곧 한 시대의 역사로 남을 수 있다면, 조훈현은 그 주인공 중 한 명일 것이다. 1953년 전라남도 영암에서 태어나 목포에서 자란 그는 아홉 살이 채 되기도 전에 바둑계에 입문하며 한국 바둑의 미래를 예고했다. 이후 그는 바둑이라는 하나의 세계에서 정점을 찍으며, 한 사람의 의지가 어떤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증명했다.

조훈현은 한국기원 소속으로 프로 바둑에 입단한 최초의 九단이자, 세계 바둑계 최초의 세계 대회인 응씨배에서 우승한 바둑사적 인물이다. 그가 일궈낸 세계무대 첫 승리는 단순한 개인의 영광을 넘어서 한국 바둑의 위상을 한 단계 끌어올린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특히 중국의 녜웨이핑과 벌였던 결승전은 한국, 중국, 일본의 기자들이 몰려든 역사적인 대국으로, 그의 승리는 세계 바둑의 판도를 바꾸는 전환점이 되었다.

 

그는 이창호의 스승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단순한 사제 관계를 넘어서는 둘 사이의 관계는 조훈현이라는 인물의 복잡한 면모를 보여준다. 제자에게 패하며 타이틀을 넘겨주었지만, 그 과정에서 보인 조훈현의 태도는 오히려 그의 위엄을 더욱 빛나게 했다. 승부의 세계에서 스스로가 꼭대기에 섰고, 그 자리를 내어주는 순간조차 품격을 잃지 않은 인물. 그것이 바로 조훈현이다.

그의 인생은 일찍이 바둑계 전설 세고에 겐사쿠 九단과의 인연에서부터 시작된다. 일본 유학 시절, 그는 기타니 문하로 갈 예정이었으나, 세고에가 조훈현을 눈여겨보며 자신의 마지막 제자로 삼았고, 그만큼 열정적으로 그를 지도했다. 원자폭탄 투하에도 살아남았던 세고에의 수제자로 성장한 조훈현은, 일본에서 일본 프로들과 경쟁하며 성장했고, 결국 한국으로 돌아와 대한민국 바둑계를 압도하게 된다.

 

귀국 후 병역 의무를 다하는 동안에도 그의 실력은 더욱 단단해졌다. 공군 복무 중에도 바둑을 놓지 않았고, 군 제대 후 본격적으로 국내 기전을 휩쓸기 시작한다. 김인, 하찬석, 서봉수 등 당대의 명기사들을 차례차례 꺾으며 타이틀을 모조리 석권, 1980년에는 전관왕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운다.

그와 서봉수의 오랜 라이벌 구도는 한 시대를 상징하는 대결로 자리 잡았고, ‘조-서 시대’라 불릴 만큼 긴 시간 동안 한국 바둑의 쌍두마차로 군림했다. 도전 5강이 그의 시대를 끝내려 했으나, 조훈현은 그들의 도전을 번번이 꺾으며 절대자의 위상을 지켰다. 심지어 도전 5강이 그와의 대국을 포기할 정도였다는 사실은 조훈현의 압도적인 실력을 방증한다.

 

그러나 세월 앞에 영원한 절대자는 없다. 조훈현이 키운 제자 이창호가 결국 스승의 벽을 넘어섰고, 그것은 단순한 세대교체 이상의 상징이었다. 스승과 제자가 세계무대에서 맞붙고, 제자가 스승의 타이틀을 하나둘씩 거머쥐는 장면은 바둑 팬들에게는 감동과 동시에 숙연함을 안겼다. 조훈현은 한때 자신이 독점하던 타이틀을 이창호에게 내주며 자연스럽게 중심에서 물러났다.

조훈현의 진정한 위대함은 여기서도 빛난다. 그는 패배를 받아들이고, 자신이 키운 제자의 성장을 기꺼이 지켜보았다. 그것은 그가 바둑계에 남긴 마지막 한 수이자,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아름다운 퇴장이었다.

그의 삶은 바둑판 위에서만 머물지 않았다. 이후 조훈현은 정치에 입문해 제20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스포츠인이 정치인의 길을 걷는 일은 드물지 않지만, 그가 바둑계에서 보여준 통찰과 결단력은 국회에서도 기대를 모았다. 비록 정치 무대에서는 바둑에서처럼 독보적인 성과를 내지는 못했으나, 조훈현이라는 이름이 단지 기사의 이름에 머물지 않고 다양한 영역으로 확장되었다는 사실은 그가 얼마나 다면적인 인물인지 보여준다.

 

2024년을 기준으로 조훈현은 여전히 바둑의 산증인으로, 후배 기사들에게 정신적 지주와도 같은 존재다. 그가 일군 업적은 단지 숫자나 기록으로 환산할 수 없는 문화적 유산이며, 한국 바둑이 세계 최강이라는 인식을 만들어낸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조훈현의 인생은 그 자체로 드라마다. 바둑을 통해 세상을 보고, 사람을 이해하며, 끝내 자기 자신과도 싸워 이긴 승부사. 바둑의 신이라 불릴 만한 그는, 이제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아 후대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그리고 그 이름은 앞으로도 한국 바둑이 존재하는 한, 결코 잊히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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