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구선수

김주성(농구) : 원주 DB 프로미 감독. 그에 대해 알아보자

사람인물배우 2024. 11. 16. 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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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성(1979년 11월 9일 출생)은 대한민국의 농구 감독이자 전직 농구 선수로, 원주 DB 프로미의 감독직을 맡고 있다. 전라북도 장수군에서 태어난 그는 농구 선수로서 파워 포워드와 센터 포지션을 맡으며, 2002년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1순위로 원주 TG삼보에 입단해 프로 경력을 시작했다. 현역 시절 동안 뛰어난 신체 조건(신장 205cm, 체중 92kg)과 경기력을 바탕으로 팀의 중요한 선수로 활약했으며, 원주 DB 프로미에서 16년간 선수 생활을 마친 후 은퇴하였다. 이후 2019년부터 코치로 활동했으며, 2023년부터 감독으로서 팀을 이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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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성은 농구 선수로서만큼이나 학문적 배경도 탄탄하다. 중앙대학교 체육과학대학에서 사회체육학을 전공하며 학사 학위를 취득하였고, 해동초등학교, 해운대중학교, 동아고등학교를 거쳐 대학에 진학했다. 또한, 그는 사회적 이슈로 면제받은 병역 문제와 함께, 어려운 가정 환경 속에서도 농구에 대한 열정으로 자신의 경력을 쌓아갔다. 그는 선수 시절 동안 팀의 중추적 역할을 하며 팬들의 사랑을 받았고, 원주 DB 프로미에서 '32번'을 달았던 그의 유니폼 번호는 현재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어 있다.

 

가족적으로는 2008년 박지선과 결혼하여 두 자녀를 두고 있다. 장녀 김서윤은 2010년생으로, 차녀는 2012년생이다. 그의 아버지 김덕환과 어머니 이영순은 그에게 큰 영향을 미친 인물들이며, 가족은 항상 김주성의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왔다. 농구 선수에서 지도자로 변신한 김주성은 현재도 농구계에서 중요한 인물로 자리잡고 있으며, 그의 지도력과 경험은 원주 DB 프로미 팀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김주성: 기록보다 팀을 우선시한 농구 전설의 여정

 

김주성은 한국 농구의 상징적인 인물 중 하나로, 그가 걸어온 길은 단순히 화려한 기록과 성취로 요약될 수 없다. 그의 농구 철학은 늘 팀을 우선시하는 것이었고, 자신이 세운 기록에 대해 그는 "나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구나"라고 회고하며, 그저 팀을 위한 최선의 노력만을 다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5년 12월 30일 고양 오리온 오리온스와의 경기에서 전인미답의 '1000 블록' 기록을 달성했을 때, 그는 "블록슛은 내가 열심히 한 보상"이라며 큰 자부심을 드러냈다. 이는 한국 농구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이었으며, 김주성은 이러한 기록을 큰 영광으로 여기면서도, 언젠가는 이 기록이 깨지기를 바란다고 겸손하게 언급했다. 이는 그가 단순히 개인의 성취에 집착하지 않고, 항상 팀의 승리를 우선시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김주성의 농구 여정은 어려운 성장 배경에서 시작되었다. 전라북도 장수군에서 태어난 그는 3급 지체 장애인 부모 밑에서 힘든 시절을 보냈다. 어린 시절, 그는 높이뛰기 선수로 활동하기도 했으나, 가정의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운동을 중단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구는 그를 끌어들였고, 해운대중학교 3학년 때 2m가 넘는 신장을 바탕으로 농구를 시작, 빠르게 두각을 나타냈다. 중앙대학교에 진학 후, 그는 대학 농구의 별로 떠오르며, 수많은 기록과 우승을 거두었다. 중앙대학교 농구부에서의 전성기는 김주성 개인의 성장뿐만 아니라, 그가 속한 팀의 강력한 전력을 의미하기도 했다. 대학 시절, 김주성은 팀의 기둥으로서 득점과 블록슛을 담당하며, 국내 농구계에서 그를 '전설'로 만든 시절을 보냈다.

 

2002년 드래프트에서 1번 지명으로 원주 TG삼보에 입단한 김주성은 이후 동부, DB를 거치며 한국 프로농구(KBL)의 간판 선수로 자리잡았다. 그의 커리어는 눈부신 성취로 채워졌다. 수많은 팀 우승과 함께, 개인적인 기록도 화려했다. 특히 블록슛 부문에서 두 차례 타이틀을 차지하며, 그를 '블록킹의 대명사'로 만들었다. 그는 또한 2015년 1000블록을 달성하며, 한국 농구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남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주성은 늘 겸손했다. 자신이 세운 기록에 대해 지나치게 자랑하지 않았고, "나보다 더 나은 선수들이 많이 있을 것"이라며 동료들과의 협력과 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런 김주성은 결국 2018년 은퇴 후 농구계에 지도자로서 다시 한 번 큰 발자취를 남기고 있으며, 현재 원주 DB 프로미의 감독으로서 팀을 이끌고 있다.

 

김주성의 은퇴 후에도 그의 여정은 계속해서 농구계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의 은퇴식은 한국 농구 팬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으며, 그의 유니폼 번호 32번은 영구 결번으로 남았다. 김주성은 항상 기록보다 팀을 우선시한 지도자로서, 그가 남긴 철학과 업적은 한국 농구의 귀감이 되고 있다.

 김주성: KBL을 대표한 수비형 빅맨의 전설

 

김주성, 그의 이름만으로도 한국 프로농구의 역사와 함께한 수많은 순간들이 떠오른다. 1999년 드래프트 1순위로 KBL에 입단한 김주성은 그 후 오랜 세월 동안 한국 농구를 대표하는 수비형 파워포워드로 자리매김했다. 무엇보다 그의 탁월한 수비 능력은 KBL 역사상 손꼽히는 수준으로, 그는 'KBL 올타임 수비형 파워포워드'로 불리며 농구 팬들 사이에서 독보적인 존재감을 자랑했다.

 수비와 운동 능력, 김주성의 강점

 

김주성의 농구에서 가장 돋보였던 점은 바로 그의 뛰어난 수비 능력이었다. 2m의 큰 키에 마른 체격을 가졌지만, 그의 스피드와 운동 능력은 빅맨으로서의 장점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김주성은 빠른 발과 좋은 탄력을 바탕으로 속공에 뛰어난 기여를 했고, 인사이드 수비에서는 블록슛과 가로채기로 상대팀의 공격을 차단했다. 또한, 운동 능력을 활용한 빠른 수비와 헬프 디펜스로 팀 전체의 수비력을 높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의 수비 능력은 단순히 블록슛에만 그치지 않았다. 김주성은 상대 선수들의 공격을 차단하는 데 그치지 않고, 팀의 공격 흐름을 돕는 패스 플레이와 스크린 플레이에서도 큰 역할을 했다. 또한, 상대보다 작은 선수들과의 매치업에서는 높이를, 힘이 좋은 상대에게는 스피드를 활용한 공격을 통해 상황에 맞는 다양한 공격 패턴을 선보였다.

 

 다재다능한 공격력

 

수비에서 보여준 장점에 못지않게 김주성은 공격에서도 자신의 실력을 인정받았다. 초창기에는 중거리 슛에 다소 미숙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 역시 능숙한 중거리 슛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특히, 빠른 발과 좋은 점프력을 이용한 덩크슛은 그의 공격의 상징적인 장면 중 하나였다. 김주성은 외국인 선수들과의 매치업에서도 덩크를 시도하며 화려한 경기를 펼쳤고, 나이가 들면서도 3점슛을 시도하는 등 새로운 공격 무기를 장착하기 시작했다.

 

2015-16 시즌, 김주성은 3점슛에서 눈에 띄는 향상을 보였고, 2016-17 시즌에는 다른 슈터들보다 월등히 높은 성공률을 기록하며 3점슛 성공률 1위에 오르기도 했다. 그의 공격 성향은 단순히 득점에만 그치지 않았으며, 리바운드를 잡고 바로 공격을 전개하는 패스 능력도 뛰어나 팀의 공격 전개를 돕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KBL 역사에 남을 기록들

 

김주성의 KBL에서의 기록은 그 자체로 한국 농구의 역사적인 사건들이었다. 그는 KBL 최초로 통산 1만 득점과 1,000 블록을 동시에 달성한 선수로, 현재까지도 그 기록은 깨지지 않았다. 이로 인해 그는 'KBL의 전설'이라는 칭호를 얻었으며, 그의 이름은 농구 역사에 깊이 새겨졌다. 특히, 그의 블록슛 기록은 압도적이다. 블록 부문에서는 서장훈을 제치고 1위에 오르며 KBL 역사상 가장 많은 블록슛을 기록한 선수가 되었다.

 

그의 뛰어난 수비 능력과 기록들은 다른 선수들이 넘기 어려운 기준이 되었으며, 많은 팬들과 후배 선수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김주성은 단순한 선수 이상의 존재였다. 그의 커리어는 KBL에서 뛰어난 기량을 발휘한 수많은 후배들에게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고, 그가 은퇴한 이후에도 그의 영향력은 여전히 KBL에서 느껴진다.

 

 노쇠화와 그 이후

 

물론, 김주성도 예외 없이 나이가 들며 신체적으로 노쇠화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2012년, 10년차 시즌에 리바운드 0개의 기록을 남기면서 그의 경기력에 대한 의문도 일었다. 당시 강동희 감독은 그에게 강도 높은 훈련을 시키며 이를 해결하려 했고, 김주성은 여전히 강한 의지와 열정으로 팀을 이끌었다.

 

하지만 그의 체력 관리를 위한 노력은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김영만 감독이 부임한 후, 출장시간을 25분 내외로 제한하며 다시금 김주성은 정상급 빅맨의 모습을 되찾았다. 2015-16 시즌, 김주성이 부상으로 결장했을 때 동부는 한때 9위로 내려갔으나, 김주성의 복귀와 함께 다시 치고 올라갔고, 그의 영향력은 여전히 강력하게 발휘되었다.

 여전히 빛나는 수비력

 

김주성은 은퇴 후에도 KBL에서의 존재감을 잃지 않았다. 2023-24 시즌 KBL 올스타전에서 김주성은 여전히 수비에서 빛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김종규의 돌파를 수비하는 장면에서는 팬들과 선수들로부터 큰 찬사를 받았다. 그의 수비 센스와 운동 능력은 단 한 번의 경기를 통해서도 여전히 현역 선수들 못지않은 기량을 보여주었고, 이로 인해 "복귀하자는 말"이 농담처럼 나오기도 했다.

 

 결론

 

김주성은 KBL 역사상 가장 독보적인 수비형 빅맨으로, 그가 남긴 기록과 영향력은 결코 간과할 수 없다. 그는 단순히 뛰어난 기량을 가진 선수가 아니라, 수비와 공격에서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며 KBL의 전설적인 존재로 자리매김한 선수였다. 그의 은퇴 이후에도 김주성의 농구 인생은 많은 이들에게 계속해서 영감을 주고 있으며, 그는 KBL 역사에 영원히 빛나는 이름으로 남을 것이다.

 

 김주성: NBA 진출 가능성에 대한 고찰

 

2023년 농구 해설자이자 NBA 전문가인 조현일은 유튜브를 통해 "역대 한국 선수 중 NBA 진출 혹은 성공 가능성이 가장 높았던 선수"로 김주성을 언급하며 큰 논란을 일으켰다. 전통적으로 한국 농구에서 허재와 서장훈이 역대 최고의 선수로 손꼽히며, 김주성은 그들과 함께 논의되는 경우가 드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주성의 NBA 진출 가능성에 대한 논의는 단순히 의외의 결과가 아니라, 한국 농구의 발전과 변화된 트렌드를 반영하는 면에서 충분히 타당한 주장일 수 있다.

 1. 김주성의 플레이 스타일과 NBA와의 유사성

 

김주성은 KBL에서 뛰어난 수비력과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며 명성을 쌓아갔다. 특히, 그의 운동 능력은 빅맨으로서 비교할 만한 선수가 적을 정도로 뛰어나며, 스피드와 긴 팔을 활용한 수비에서 많은 가치를 발휘했다. 또한, 선수 생활 후반기에는 3점 슛을 장착하며 더욱 다채로운 공격 옵션을 갖춘 선수로 발전했다. 이런 점에서 김주성은 당시 한국 농구의 전형적인 '골밑 중심' 플레이에서 벗어나, 현대 농구의 '3&D(3점 슛과 수비)' 역할을 자연스럽게 소화할 수 있는 선수가 됐다.

 

김주성의 뛰어난 신체 조건, 즉 190cm대의 키와 빠른 발, 탄력적이고 긴 팔은 NBA에서 요구하는 수비적인 특성을 잘 갖추고 있었다. 물론, 전통적인 빅맨 역할로서는 NBA에 진출하기 어려웠겠지만, 수비와 3점 슈터 역할을 맡는 '롤 플레이어'로서의 가능성은 충분히 열려 있었다. 일본의 와타나베 유타가 NBA에서 3&D 스타일로 성공한 사례를 보면, 김주성도 비슷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2. 한국 농구에서의 한계와 기회

 

한국 농구에서 김주성이 차지하는 위치는 단순히 '롤플레이어'에 그친다고 평가될 수 있지만, 그의 스타일은 당시 한국 농구의 흐름과 맞아떨어졌다. 그 시절 한국 농구는 '양궁 농구'라는 별칭처럼 외곽 슛보다는 골밑을 지키는 장신 센터의 역할을 중요시했다. 특히, 서장훈과 김주성은 장신 센터로서 골밑을 중심으로 활동했지만, 외곽 슛에 대한 비판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김주성은 초창기에는 중거리 슛을 거의 자제했지만, 점차 3점 슛을 시도하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 그러나 그가 더 일찍 3점 슛과 미들슛을 개발했다면, 그의 커리어는 더욱 빛났을 수도 있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특히 김주성이 국제 무대에서 경쟁했을 때, 그가 보여준 경기력은 인상적이었지만 압도적인 수준까지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강력한 수비력과 팀 중심의 플레이로 큰 기여를 했고, 그 덕분에 KBL에서 오랜 기간 동안 활약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만약 김주성이 더 일찍 'NBA 스타일'의 농구를 채택했다면, 미국에서 그의 가치는 더욱 돋보였을 가능성도 충분히 존재했다.

 3. NBA에서의 역할 가능성

 

김주성이 NBA에서 어떤 역할을 맡을 수 있었을지에 대해 생각해보면, 그는 현대 농구에서 요구하는 다재다능한 빅맨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특히 수비적인 강점과 3점 슛 능력을 가진 선수가 벤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김주성의 수비 센스와 운동 능력은 NBA에서 큰 자산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예를 들어, 와타나베 유타는 일본 출신 선수로 NBA에서 3&D 역할을 맡으며 상당한 경력을 쌓았다. 김주성도 비슷한 경로를 따라, NBA의 여러 팀에서 수비와 외곽 슛을 담당하는 '벤치 멤버'로서 꾸준한 활약을 펼쳤을 가능성이 있다.

 

김주성의 경우, 빅맨으로서의 신장과 체격은 NBA에서 경쟁하는 데 큰 도전 과제가 될 수 있었지만, 수비와 슈팅 능력을 조화롭게 발전시켰다면, NBA에서 장기적인 커리어를 쌓을 수 있었을 것이다. 현재 NBA에서 활약하는 많은 선수들이 3점 슛을 중심으로 하는 '스페이싱' 농구를 구사하고 있는 가운데, 김주성이 그 시대에 맞춰 3점 슛을 추가한 후에는 그의 경력이 더욱 빛을 발했을 가능성이 크다.

 

 4. 결론

 

김주성의 NBA 진출 가능성은 단순한 가설이 아니라, 현대 농구의 트렌드와 그의 능력, 그리고 농구 세계의 변화된 흐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합리적인 예측이다. 물론 당시 한국 농구의 한계와 구조적인 문제로 인해 그는 NBA에서 뛰지 못했지만, 그가 더 일찍 3점 슛을 개발하고 현대 농구의 스타일에 맞춰 훈련했다면, 분명히 NBA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을 수 있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김주성은 KBL에서 최고의 선수 중 하나로 기억될 것이며, 그의 능력과 커리어는 한국 농구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만약 그가 NBA라는 무대에서 자신의 능력을 펼쳤다면, 그 또한 또 다른 전설을 쓸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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