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원

김성태 : 대한민국 제18-20대 국회의원, 그에 대해 알아보자.

사람인물배우 2025. 5. 12. 0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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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태는 대한민국의 정치인으로, 가족으로는 배우자 허덕순과 아들 김용석, 딸 김보현이 있다. 진주중안초등학교, 진주중학교, 진주기계공업고등학교를 졸업했으며, 강남대학교에서 법학 학사, 한양대학교 대학원에서 사회복지학 석사를 마쳤고, 경상국립대학교에서 사회복지학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육군 병장으로 병역을 마쳤으며, 개신교 장로회 신자이고 키는 172cm이다. 현재 국민의힘 소속으로, 제18·19·20대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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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학생 시절 한양대학교 행정대학원 총학생회장을 지냈으며, 제5대 서울특별시의회 의원으로 정치에 입문했다. 이후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사무총장, 노사정위원회 상무위원, 보건복지부 국민연금기금 운영위원 등 노동과 복지 관련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했다. 또한 손기정기념재단 이사장을 지내는 등 사회단체에서도 다양한 경력을 쌓았다. 이명박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상임자문위원으로 참여하며 정치적 입지를 넓혔다.

김성태

국회에서는 한나라당, 새누리당, 바른정당, 자유한국당 등 보수 정당 내 주요 직책을 두루 맡았다. 제20대 국회 전반기 국정조사특별위원회 위원장, 국회운영위원회 위원장, 자유한국당 원내대표 및 대표 권한대행 등을 역임했으며, 여의도연구원 이사장과 국민의힘 중앙위원회 의장 등 당 내외에서 중책을 맡아왔다. 현재는 국민의힘 서울특별시당 고문으로 활동 중이다.

김성태: 노동자의 심장에서 보수의 심장으로

 

김성태라는 이름은 한국 정치의 모순성과 다면성을 상징하는 대표적 인물 중 하나다. 노동운동가로서, 건설 현장에서 굳은살 박힌 손으로 현장의 권리를 외치던 그가 이후 보수 정당의 심장부까지 진입한 인생 궤적은, 한국 현대사의 복잡한 이념 지형과 현실 정치의 역학 구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진주의 가난한 골목에서 태어나 사우디아라비아 건설 현장을 거쳐, KT 노동조합 간부에서 한국노총 사무총장에 이르기까지 노동 현장의 언어를 몸으로 익혔고, 정치인으로서는 강서구의 지역 현안부터 국정 농단 청문회에 이르기까지 권력의 심장부를 누볐다.

1958년 경상남도 진주시에서 태어난 김성태의 유년은 그 자체로 노동자의 서사다. 진주중안초등학교에서 진주기계공업고등학교까지, 실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그는 바로 삶의 현장으로 뛰어들었다. 병역의무를 마친 후, 1980년대 초반 해외로 파견된 건설노동자로 사우디아라비아의 뜨거운 사막 위에서 생계를 꾸렸다. 이 시기 그는 단순한 생존을 넘어 연대와 노동의 의미를 내면화했으며, 그것이 훗날 노동조합 활동의 기초가 된다.

KT에 입사한 이후 그는 빠르게 노동조합 간부로 성장했고, 이후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의 사무총장까지 역임하며 노동계의 중추적 인물로 부상했다. 특히 2003년 노사정위원회의 노동계 대표로서 참여한 '주5일 근무제' 협상은 그가 실질적 성과를 남긴 중요한 이정표다. 이 시기 그는 노동의 정치를 제도 정치로 연결하는 교량 역할을 자임했고, 이것이 바로 김성태 정치 인생의 서막이었다.

정계에 첫 발을 디딘 것은 1998년 서울특별시의회 비례대표 의원으로서였으며, 이후 한국노총으로 돌아가 재차 사무총장을 역임하며 노동계의 입지를 다졌다. 그러나 2007년, 김성태는 보수 정당 한나라당에 입당하며 새로운 궤적을 그린다. 그가 강서구 을에 출마해 민주당의 현역 의원 노현송을 꺾고 당선된 2008년 제18대 총선은 그 변화의 시작점이었다. 이후 19대, 20대 총선에서도 연달아 당선되며 강서구의 3선 의원으로 자리잡았고, 이 과정에서 ‘노동운동가 출신 보수 정치인’이라는, 언뜻 상충되는 이력의 소유자가 되었다.

김성태는 지역구 국회의원으로서 강서구의 교통, 주거, 환경 문제 해결에 주력했다. 서부광역철도의 조기 착공, 김포공항 교통센터 조성, 개화산 호수공원 조성 등 다수의 지역 사업이 그의 의정활동 결과였다. 또한 국정 차원에서는 '대체 휴일 제도', '정년 60세 연장법' 등을 발의하며 노동 친화적 입법에도 기여했다. 특히 보수 정당 소속 의원임에도 불구하고 ‘서민정당’을 표방하며 실용주의적 정책 노선을 견지한 점은 그를 당 내 차별화된 존재로 자리매김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가 전국적 정치인으로 발돋움한 결정적 계기는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태 국정조사에서다. 김성태는 해당 청문회의 위원장으로서 날선 질의와 강단 있는 진행으로 대중의 주목을 받았다. 최순실의 불출석에 동행명령장을 발부하고, 우병우 전 수석에게 “답변 자세가 그게 뭐냐”며 호통치는 모습은 대중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우벵우 정인!”이라는 특유의 경상도 사투리 억양은 패러디와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만의 정치적 브랜드가 되었다.

 

보수진영 내부에서 그는 비주류이자 개혁파로 분류되었다. 2016년 새누리당의 분당 사태 당시 바른정당에 합류했다가 2017년 홍준표 지지를 선언하며 복당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정치 철새’ 혹은 ‘박쥐 정치인’이라는 비판을 받았고, 본인도 “복당 이후 가장 많은 욕을 먹었다”고 고백했다. 그럼에도 그는 “좌파 집권을 막기 위해 단일화를 선택한 것”이라며 자신의 선택을 ‘보수 개혁’의 일환으로 포장했다. 비록 그 의도가 순수했는지는 평가가 갈릴 수 있으나, 적어도 그는 보수 정당 내 노선 투쟁에서 중심축 역할을 자임했다.

2017년 자유한국당 원내대표에 선출되며 당내 실질적 권력자가 되었고, 2018년 드루킹 특검을 위해 국회 앞에서 단식 투쟁까지 감행했다. ‘혼수성태’라는 조롱 속에서도 그는 결국 특검을 관철시켰고, 드루킹과 김경수 지사의 유죄 판결은 결과적으로 그의 정치적 승리로 귀결되었다. 이는 ‘웃음거리로 시작해 실질적 결과를 만들어낸 정치인’이라는 평가를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정치란 성과만큼이나 이미지의 영역이기도 하다. 그는 제천·밀양 화재 참사 현장에서 정치적 퍼포먼스를 시도하다 유족들의 항의를 받았고, 임종석 전 실장과의 설전, 홍준표 전 대표와의 갈등 등에서 다소 조급하고 감정적인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원내대표로서의 리더십은 명확한 성과보다는 ‘무난함’으로 평가받았으며, 결국 보수 정당의 전당대회 국면에서도 뚜렷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 채 주변인으로 밀려났다.

 

김성태는 어느 순간부터 강서구 지역 정치인에서 중앙 정치의 투사로, 다시 시사 프로그램의 패널로 자리를 옮겼다. 하지만 2023년 강서구 을 당협위원장으로 복귀하며 정치적 재기를 모색하고 있다. 이는 그가 아직도 현실 정치에서 자신의 이름을 지우지 않았다는 방증이며, 다시 한 번 강서구를 기점으로 제도 정치에 복귀할지 여부는 향후 보수 정치의 향배와 무관하지 않다.

결국 김성태는 한국 정치에서 보기 드문 ‘현장 출신 정치인’이다. 그는 노동자의 언어와 보수의 언어를 동시에 구사할 수 있는, 양극단 사이의 통역자이자 변형자였다. 한국 사회가 더 이상 이념의 낡은 틀에 갇히지 않고 현실과 타협하며 전진하려면, 김성태 같은 인물의 등장은 불가피하다. 문제는 그가 이 복합적 정체성을 진정성 있게 다듬어낼 수 있는가다. ‘현장과 권력의 교차로’에서 김성태는 여전히 시험대 위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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