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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득 : 제17대 후반기 국회부의장 및 前 대통령 이명박(MB)의 친형. 그에 대해 알아보자

사람인물배우 2024. 10. 28.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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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득(李相得, 1935년 11월 29일 ~ 2024년 10월 23일)은 대한민국 제17대 후반기 국회부의장으로서 중요한 정치적 역할을 수행한 인물이다. 이상득의 출생지는 일본 오사카부로, 가족의 배경은 경주 이씨로 알려져 있다. 서울대학교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이상득은 군 복무 후 다양한 기업과 정치 활동을 통해 경력을 쌓았다.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와 같은 여러 기관에서 활동하며, 경제 정책과 평화 통일 관련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이상득은 정치 경력 초기에는 민주정의당에서 활동을 시작해, 이후 민주자유당, 신한국당, 한나라당 등 여러 정당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맡았다. 경북 영일군과 포항시 남구에서 국회의원으로 여러 차례 선출되었으며, 제15대 국회에서는 전반기 재정경제위원회 위원장으로서 국가 경제에 기여했다. 또한,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의 일본 특사로 임명되기도 하였으며, 한일의원연맹 회장직을 역임하는 등 한일 관계 증진을 위한 노력에도 힘썼다. 이상득의 개인적인 삶에서도 이상득은 다채로운 역할을 맡았다. 가족으로는 배우자 최신자와 자녀들, 그리고 여러 형제자매가 있다. 이상득은 2024년 10월 23일 서울대학교병원에서 향년 88세로 별세하였으며, 경기도 이천시의 에덴낙원에 묘소가 있다. 이상득의 업적과 정치적 여정은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한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상득이 남긴 영향력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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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득: 대한민국의 국회부의장을 역임한 6선 국회의원

 

이상득(李相得)은 1935년 11월 29일 일본 오사카부 나카카와치군에서 태어나 대한민국 정치의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한 인물이다. 목장 노동자로 일했던 이충우와 채태원의 아들로 태어난 이상득은 1945년 광복 이후 영일군 흥해읍으로 이주하며 성장하였다. 포항 동지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지만, 부상으로 중퇴하게 되었고,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여 학위를 취득했다. 1979년에는 코오롱그룹에 입사해 대표이사와 사장을 역임하며 기업인으로서의 경력을 쌓았다. 1987년부터는 산업연구원 이사를 역임하며 경제 정책에도 깊이 관여하였다.

 

이상득의 정치 경력은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후보로 당선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민주자유당과 신한국당을 거쳐 한나라당에서의 활동으로 이어졌다. 이상득은 경북 영일군과 울릉군 선거구에서 여러 차례 당선되며, 원내총무와 정책위의장 등 중책을 맡았다. 특히 2006년부터 2008년까지 제17대 국회 후반기 국회부의장으로 재직하며 정치적으로 최전선에 서 있었다. 이명박 대선 후보의 캠프에서 조직을 관리하며 대선 자금 조달에 기여한 이상득은 이명박 정부에서 실권자로 자리매김하였다. 이상득의 정치적 업적은 이상득이 동생인 이명박 대통령과 함께 부각되는 가운데, 이상득의 뛰어난 정치적 감각과 능력을 입증했다.

 

이상득의 정치적 영향력은 지역구인 포항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났다. 이상득은 지역 숙원 사업 해결을 위한 대규모 예산을 확보하는 등 지역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6선 의원으로 당선된 이상득은 이후 여론의 변화에 따라 2011년 불출마를 선언하며 정계를 은퇴하였다. 이상득의 생애와 정치적 여정은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한 부분을 차지하며, 이상득의 업적은 앞으로도 회자될 것이다.

 이상득: 삶과 유산

 

이상득(李相得)은 2024년 10월 23일, 향년 88세로 숙환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상득은 오랜 기간 동안 지병으로 서울대병원에 입원해 있었으며, 이상득의 죽음은 많은 이들에게 슬픔을 안겼다. 동생 이명박 전 대통령을 비롯한 친이계 인사들, 그리고 재계의 여러 인사들이 이상득의 빈소를 찾아 조문하였다. 특히,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의 박찬대 원내대표도 이상득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찾아왔다. 이상득의 발인은 2024년 10월 26일, 소망교회에서 엄수되었으며, 유해는 서울추모공원에 화장된 후 경기도 이천시의 에덴낙원에 봉안되었다.

 

이상득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으로서 많은 이들에게 기억될 인물이다. 그러나 이상득의 경력에는 여러 논란과 사건이 얽혀 있다. 2012년, 이상득은 솔로몬·미래저축은행으로부터 불법 정치자금을 수수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헌정 사상 처음으로 현직 대통령의 친형으로서 구속되는 불명예를 안았다. 이로 인해 이상득은 징역 1년 2개월의 실형을 선고받고 2013년 9월에 만기출소하였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퇴임 직전 형을 사면시키려 했으나, 여론의 반발로 이를 포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2015년 포스코 비리와 관련하여 검찰의 수사를 받았고, 2017년에는 항소심에서도 1심과 같은 결과를 받아 징역 1년 3개월형이 확정되었다. 이상득은 결국 2020년 8월에 만기 출소하였지만, 이상득의 정치적 경력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사건들이었다.

이상득은 2018년 국정원 특수활동비를 수수한 혐의로 검찰에 압수수색을 받았으나, 건강 문제로 조사가 중단되는 등 이상득의 정치적 삶은 여러 차례 위기에 직면하였다. 그러나 이상득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잃지 않고, 꾸준히 대한민국의 정치 지형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했다.

 

이상득은 일제강점기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큰 체구와 뛰어난 외모로 주목받았다. 이상득의 키는 182cm로, 동생 이명박보다 훨씬 큰 편이었다. 이상득은 고유의 경상도 사투리를 사용하면서도 부드럽고 나긋나긋한 말투로 주변의 인정을 받았다. 정치적 대립 속에서도 이상득은 정세균 전 국무총리와의 친분을 쌓는 등 다양한 인맥을 형성하였고, 이는 이상득의 정치적 삶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상득은 마지막까지 강북 성북동에서 거주하며, 정치인으로서의 여정을 마무리하였다. 이상득의 죽음은 많은 이들에게 깊은 슬픔을 안기며,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이상득의 발자취는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이상득(李相得)은 한국 정치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특히 경상북도 지역구에서만 6선을 달성하며 한 번도 낙선한 경험이 없는 정치인으로 알려져 있다. 이상득의 지역구는 보수 정당의 공천만 받으면 당선이 확실한 지역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이러한 정치적 기반은 이상득이 지역사회에서 지속적으로 지지를 받아왔음을 보여준다.

2010년, 이상득은 무아마르 카다피의 리비아 정부와의 관계가 악화되었을 때 특사로 파견되어 한-리비아 관계의 개선을 위해 노력한 바 있다. 그러나 이듬해 카다피가 리비아 내전으로 몰락하자, 이상득은 '리비아 정부의 유혈 진압 규탄 및 중동·아프리카 지역의 민주화 지지 결의안'에 기권하는 결정을 내렸다. 이는 이상득의 정치적 신념과 외교적 판단이 복잡하게 얽혀 있음을 나타낸다.

 

2012년, 이상득은 일제 강점기에 불법으로 유출된 조선왕조의궤 반환에 기여한 공로로 문화재제자리찾기 대표인 혜문 스님으로부터 감사패를 받았다. 그 당시 한일관계가 순조롭던 일본 민주당 집권 시절, 이상득은 이낙연과 함께 일본과의 막후 교섭에 힘을 쏟았다. 그러나 이후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과 일왕 사죄 발언이 겹치면서 양국의 관계는 다시금 악화되었다.

 

이상득은 자신의 고향인 경상북도 포항시 흥해읍 덕성리에 공적비가 세워졌으나, 이는 이상득의 사망 하루 전인 2024년 10월 23일에 보도되었다. 향년 89세의 나이에 별세하며 이상득의 유산은 계속해서 논의될 것이다.

이상득의 정치 경력은 다음과 같은 선거 이력으로 나타난다. 이상득은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소속으로 당선되었으며, 이후 1992년 제14대, 1996년 제15대, 2000년 제16대, 2004년 제17대,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모두 당선되며 총 6선을 기록하였다.

 

이상득의 정치 생애 동안 소속된 정당은 민주정의당(1988 - 1990), 민주자유당(1990 - 1995), 신한국당(1995 - 1997), 한나라당(1997 - 2012), 새누리당(2012 - 2017), 무소속(2017 - 2024)으로, 이상득은 2017년 탈당 후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이상득은 자신의 공적을 인정받아 여러 차례 수훈을 받았다. 1981년에는 교육공로로 국민훈장 동백장을, 산업공로로 산업훈장 동탑훈장을 수여받았다. 이러한 공로들은 이상득이 단순한 정치인이 아닌, 지역사회와 국가에 기여한 인물임을 시사한다.

 

이상득의 삶과 경력은 한국 정치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며, 이상득의 유산은 후대에 계속해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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