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응은 1977년 7월 10일 광주광역시에서 태어난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이자 현 지도자이다. 서재응은 광주화정초등학교, 광주충장중학교, 광주제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인하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했지만 중퇴하였다. 1996년 해태 타이거즈의 고졸 우선 지명을 받아 프로에 입문했으며, 1998년 뉴욕 메츠와 국제 아마추어 자유계약을 체결하며 미국 메이저리그에 도전했다. 이후 뉴욕 메츠,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탬파베이 데블레이스를 거쳐 KIA 타이거즈에서 KBO 리그 커리어를 마감했다. 서재응은 선수로서의 경력을 마친 뒤 지도자로 변신하여 다양한 팀에서 투수코치 및 수석코치 역할을 맡았다. 2017년 저니맨 외인구단의 투수코치로 지도자 경력을 시작한 서재응은 2025년부터 NC 다이노스의 1군 수석코치로 합류할 예정이다. 또한 2024년에는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의 불펜코치를 맡으며 국제 대회에서도 활약할 계획이다. 해설위원으로도 활동하여 2016년부터 2017년까지 SBS Sports, 2024년에는 SPOTV에서 야구 해설을 맡았다.
서재응의 개인 생활에서는 예술체육요원으로 병역을 마쳤으며, 2005년 이주현과 결혼해 슬하에 세 자녀를 두고 있다. 서재응은 선수협회 회장으로 활동하며 한국프로야구 발전을 위해 기여했고, 2024년에는 KBO 전력강화위원으로도 임명되어 야구계의 발전을 위해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서재응은 대한민국의 전직 야구 선수이자 현재 NC 다이노스의 수석코치로 활동하고 있다. 선수 시절 서재응은 선발 투수로 활약했으며, 특히 뉴욕 메츠에서 인상적인 시즌을 보내며 한국인 메이저리거 1세대 투수로서 박찬호의 뒤를 이었다. 서재응은 메이저리그에서 제구력을 바탕으로 경쟁력을 보여주었으며, 2008년에는 고향팀 KIA 타이거즈로 복귀해 KBO 리그 무대에 다시 등장했다. 비록 기대만큼의 활약은 펼치지 못했으나, 2009년 한국시리즈 우승 멤버로서 팀에 기여했고, 이후 선발진에서 한 축을 담당하며 베테랑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은퇴 후 서재응은 해설위원과 방송인으로 활동하며 야구팬들과의 소통을 이어갔다. 2018년에는 코치로서 KIA 타이거즈에 복귀해 팀의 불펜진 재건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서재응의 카리스마와 리더십은 차기 감독 후보로 거론될 정도였으나, 코치 말년에는 투수 교체 등 일부 전략적 선택에서 아쉬움을 남기며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서재응은 점차 지도자로서의 역량을 다듬어 가고 있다.
서재응의 선수 생활은 초기와 후기에 뚜렷한 변화를 보였다. 메이저리그 진출 초기에는 시속 150km에 육박하는 강속구를 주무기로 삼아 타자들을 윽박지르는 스타일이었지만, 팔꿈치 부상 이후에는 제구력과 변화구를 바탕으로 한 정교한 투구로 방향을 전환했다. 2006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의 활약은 서재응의 이름을 세계 야구계에 알린 대표적인 순간으로, 한국 야구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서재응은 은퇴 후 야구 해설자로서 활동하며 논란과 성과를 동시에 겪은 인물이다. 2016년 SBS Sports와 계약하면서 본격적인 해설자로 데뷔했으며, 주로 KBO 리그 경기 중계를 맡았다. 그러나 데뷔 초반부터 편파 해설과 발음 문제 등으로 논란이 일었는데, 특히 KIA 타이거즈와 관련된 경기에서 특정 팀에 대한 편향된 해설로 비판을 받았다. 첫 해설 경기였던 KIA와 LG의 맞대결에서 이순철 해설위원과 호흡을 맞췄지만, 이로 인해 LG 팬들의 불만을 샀다. 이후에도 해설자 자질 논란이 이어지며 영호남 해설의 양대산맥으로 불릴 정도로 평가가 갈렸다.
서재응의 해설 스타일은 주로 서재응이 익숙한 팀과 선수들에 대한 해설이 강점을 보였으나, 이를 넘어서는 편파적인 시각이 문제로 지적됐다. SK 와이번스와 KIA 타이거즈 간의 경기나 연장전 상황에서의 해설은 비난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전라도 사투리가 짙은 발음과 자주 반복되는 특정 팀 편향 해설이 팬들에게 불쾌감을 주었으며, 결국 "편파 해설"이라는 꼬리표가 붙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재응의 해설은 일부 팬들 사이에서 서재응의 경험과 인사이트를 바탕으로 한 현실적인 분석이라는 긍정적 평가도 받았다.
2024년 SPOTV로 이적하며 해설자로서 새로운 기회를 맞이했지만, 여전히 자질 논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특정 경기에서 명백히 KIA 편향적인 해설을 하며 다시 한번 팬들의 빈축을 샀으며, 결국 2025년 NC 다이노스의 수석코치로 부임하며 해설위원직을 내려놓았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서재응은 해설자로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기 위해서는 공정성과 발음, 언어 전달력 등의 측면에서 개선이 필요하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서재응은 다채로운 피칭 스타일과 인상적인 기록을 남긴 한국 야구계의 대표적인 투수다. 서재응의 커리어는 초기 파이어볼러에서 기교파 투수로 변모해 나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아마추어 시절 최고 95마일(153km/h)의 속구를 던졌던 서재응은, 토미 존 수술 이후 구속이 떨어지며 메이저리그에서 기교를 중심으로 한 스타일로 변화했다. 2003년 메이저리그 데뷔 시즌, 102타자 연속 무볼넷이라는 기록은 서재응의 정교한 제구력을 잘 보여준다. 이는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은 기록으로 남아있다.
메이저리그 시절 서재응은 140km/h 중후반대의 포심 패스트볼과 투심 패스트볼, 체인지업을 주로 구사했으며 커브도 종종 사용했다. 이후 구속 저하에 따라 포크볼, 커터, 슬라이더 등을 추가했고, KBO 복귀 후에는 포크볼을 결정구로 삼아 볼 배합을 다양화했다. 특히 투심과 커터는 당시 국내에서 드물었던 구종이었고, 이를 통해 타자와의 심리 싸움 능력이 크게 발전했다. 연속 이닝 선발 무실점 기록을 세우는 등 KIA 타이거즈에서 선발진의 한 축으로 자리 잡았다.
서재응의 노쇠화 과정은 다소 천천히 진행되었다. 매년 약 1km씩 구속이 점진적으로 떨어졌으며, 갑작스러운 부진이 나타났던 주요 시점은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WBC) 참여 이후였다. 2006년과 2013년 두 번의 WBC 참가 후 서재응은 각각 메이저리그와 KBO에서 급격한 성적 저하를 겪었으며, 이는 국가대표 선수 차출과 관련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재응은 두 번 모두 구단의 반대와 불이익을 무릅쓰고 국가대표로 나선 점에서 애국심과 책임감을 보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서재응은 단순한 투구 능력 외에도 KIA 타이거즈의 선발진이 강한 팀으로 평가받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양현종, 윤석민, 아킬리노 로페즈 등 팀의 에이스가 매년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서재응은 꾸준히 2~3선발로 활약하며 팀을 지탱했다. 서재응의 안정된 피칭과 타자와의 수싸움 능력은 경기 흐름을 이끄는 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별명 역시 서재응의 다채로운 커리어를 반영한다. 성적 부진 시기에는 "서재앙"이나 "서익스피어" 같은 부정적인 별명으로 불렸으나, 반대로 안정적인 투구를 보일 때는 "무등예수"라는 별명으로 칭송받기도 했다. 선수로서의 여정은 부상, 국가대표 활동, 그리고 경기 내외적인 이슈로 인해 굴곡이 있었지만, 서재응의 투혼과 헌신은 한국 야구 팬들에게 오랜 시간 기억될 것이다.
서재응은 한국 야구의 아이콘으로, 서재응의 경력은 단순히 피칭 능력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인간적 면모와 경험을 담고 있다. 2012년 6월 14일 히어로즈 전에서 캐스터가 최희섭에게 광주일고 시절을 물었을 때, 최희섭은 서재응이 자신의 최고참으로서 얼차려를 비롯한 가혹행위를 막아주었다고 증언하였다. 이로 인해 최희섭은 주장으로서 쓸데없이 군기를 잡고 후배들을 괴롭혔다는 이유로 서재응과 비교되어 비판을 받기도 했다. 물론 서재응도 김진우와 함께 애먼 포수 이홍구를 대놓고 야단치는 모습이 방송에 잡히긴 했지만, 최영필이나 헨리 소사 등 다른 선수들도 이홍구의 볼 배합에 대해 혼내는 장면이 있었기에 서재응만의 문제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는 후배의 실수를 지적하는 것이 선배로서 당연한 역할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서재응은 2013년 3월 11일 박재홍의 은퇴로 공석이 된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 협회장에 선출되었고, 2014 시즌 후에는 단체훈련금지로 인해 논란을 일으켰다. 규정이 원래 있었던 것임에도 불구하고, 넥센이 한화와 김성근 때문에 문제가 발생했다는 주장이 비난을 초래했다.
메이저리그에서 마지막으로 몸담았던 탬파베이 데블레이스에서의 일화도 흥미롭다. 당시 젊은 남성이 그에게 팀에 대한 의견을 물었을 때, 서재응은 말단 직원으로 오해해 솔직히 "처음에 왔을 때는 기분이 더러웠는데, 막상 와서 지내 보니 나름 괜찮다."고 대답하였다. 그 남성은 나중에 탬파베이의 단장 겸 부사장이 된 앤드류 프리드먼이었다.
은퇴 후에도 서재응은 KIA 타이거즈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았다. 서재응은 관중석에서 경기를 관람하는 모습이 여러 차례 목격되었으며, 두 아들의 이름인 해성, 태성이 해태 타이거즈에서 따온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우연의 일치라고 한다. 장남 태성은 광주서석고등학교, 차남 해성은 광주서석중학교에 재학 중이다(2024년 기준).
서재응은 어린 시절, 친구들과 함께 김봉연의 집에 찾아가 사인을 요청한 기억이 있다. 서재응은 선동열, 이종범, 이강철 등 다른 레전드들 중에서도 김봉연을 가장 우상으로 꼽았다. 하지만 서재응은 자신의 경력에서 단 한 번도 10승을 달성하지 못한 투수로 잘 알려져 있다. 2003년 뉴욕 메츠 시절, 어메이징한 팀 타선 덕분에 9승을 기록했으며, 2005년에도 뒤늦게 콜업되어 8승에 그쳤다. 이후 WBC 후유증과 잔부상으로 하락세에 빠진 서재응은 2010년에도 시망한 타선과 불펜의 불질로 인해 9승을 기록하며 다시 한 번 10승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커리어 하이인 2012 시즌에는 2.59의 방어율을 기록하며 에이스다운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불펜의 불안정성으로 인해 9승에 그쳤고, 결국 윤석민상 유력 후보가 되었다. 서재응은 2016년 은퇴하면서 10승의 꿈이 영원히 물거품이 되었고, 이는 서재응이 경험한 여러 어려움과 함께 한국 야구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서재응의 이야기는 단순한 승패의 연대기를 넘어서, 인품과 인간관계의 중요성을 상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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