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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수 : 대한민국 제36대 서울고등검찰청 검사장, 그의 프로필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사람인물배우 2025. 2. 14.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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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수는 1952년 2월 15일 전라남도 목포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동성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에서 종교학을 전공하여 학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법학 석사과정을 수료하고, 단국대학교 대학원에서 특수법무학 박사 과정을 마쳤다. 그의 경력은 대한민국의 검찰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다양한 법률 및 공직 경로를 거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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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수는 제36대 서울고등검찰청 검사장으로 재임하며 중요한 법조인으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2007년 11월 26일부터 2009년 1월 15일까지 서울고등검찰청 검사장을 역임했고, 이 외에도 서울지방검찰청 부장검사, 대검찰청 공안기획관,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 등을 거쳐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실 사정비서관 등 중요한 공직을 수행했다. 참여정부와 국민의 정부 시절, 검찰의 중요한 직책을 맡으며 많은 법적 사안에 관여하였다.

또한 박영수는 검찰을 떠난 후에도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을 이어갔다. 그는 우리금융지주 이사회 의장으로서 금융계에서의 경험을 쌓았고, 건국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좌교수로 활동했다. 이후 화천대유자산관리의 상임고문 역할을 맡는 등, 법률과 금융, 기업 분야에서도 영향력 있는 인물로 활동했다. 박영수는 특히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사건에서 특별검사로 임명되어 국민들의 큰 관심을 끌었으며, 그의 역할은 한국 현대 정치사에 중요한 부분으로 남아 있다.

박영수는 대한민국의 검사 출신 변호사로, 검찰에서의 경력과 이후 변호사로서 활동을 통해 많은 논란과 사건에 연루되며 주목을 받았다. 그의 일생과 경력, 논란을 살펴보면 그는 한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로, 그가 맡은 주요 사건들과 그의 역할은 대한민국 법조계에서 큰 영향을 끼쳤다.

 

 

1. 박영수 - 초기 생애와 학력

 

박영수는 전라남도 목포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전통적인 법조 가문으로, 박영수는 그의 할아버지인 박명효 초대 북제주군수와 아버지 박창택 변호사의 영향을 받았다. 박창택은 목포 지역의 향판(鄕判)으로 유명하며, 박영수 역시 어린 시절부터 법의 세계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학창 시절 서울로 유학하여 경기중학교를 졸업하고 동성고등학교를 다녔다. 이후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종교학과에 진학하여 1975년 졸업한 뒤, 고려대학교 대학원 법학과에 진학해 1978년에 수료했다. 1978년 제20회 사법시험에 합격한 후, 1980년 제10기 사법연수원을 수료했다.

2. 검사로서의 경력

 

박영수는 사법시험 합격 후, 수원지방검찰청, 대전지방검찰청, 수원지방검찰청 등 여러 지역에서 검사로 재직하며 경력을 쌓았다. 그는 특히 강력 부문과 특수 부문에서 활약했으며, 1990년대 후반에는 조폭 소탕과 관련된 중요 사건을 수사했다. 이러한 활약으로 그는 검사로서의 입지를 다지게 되었다.

 

2001년, 김대중 정부 때 청와대 민정수석실 사정비서관으로 발탁되면서 박영수의 경력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다. 박영수는 청와대에서 박지원과의 인연을 바탕으로 중요한 자리로 승진하며, 정치적 입지를 확고히 했다. 노무현 정부가 출범하면서 그는 빠르게 고위직으로 승진했으며, 서울지검 2차장검사와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대검 중수부장) 등을 맡으며 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3. 재벌 수사와 ‘재계의 저승사자’ 별명

 

노무현 정부 하에서 박영수는 재벌개혁을 위한 주요 인물로 떠오르며 큰 주목을 받았다. 그는 SK그룹 최태원 회장의 글로벌 분식회계 사건을 수사하여 최 회장을 기소하고, 현대차 정몽구 회장에 대한 비자금 수사를 지휘했다. 그의 재벌 수사에 대한 강력한 태도와 적극적인 수사 방침은 그를 '재계의 저승사자'라는 별명으로 부르게 만들었다.

 

2006년에는 현대차그룹의 비자금 사건을 수사하며 정몽구 회장을 구속기소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박영수를 대한민국 법조계에서 강력한 인물로 자리잡게 했고, 그는 많은 국민들에게 신뢰를 얻으며 주요 사건을 다루는 검사로 활약했다.

4. 검사 퇴임 후 변호사로서의 활동

 

박영수는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살한 사건을 수사하며 '과잉수사' 논란에 휘말린 후, 임채진 검찰총장이 사직하면서 새로운 검찰총장으로 김준규가 임명되었다. 이로 인해 박영수는 검찰을 퇴임하게 되었고, 이후 변호사로서 새로운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는 법무법인 강남 대표변호사로 재직하며 변호사로서 활동을 이어갔다.

 

검찰 퇴임 직후, 박영수는 노무현 전 대통령과 관련된 박연차 게이트 사건의 변호를 맡으면서 한때 친노 세력으로 부각되었다. 박영수는 박연차 회장의 변호를 맡으며, 정치적 입지를 더욱 확고히 했고, 이 사건은 그가 정치와 법조계에서 어떤 중요한 인물인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기억된다.

5. 세빛섬 배임 의혹과 무혐의 판결

 

2013년 박영수는 오세훈 전 서울시장의 세빛섬 사업과 관련된 배임 의혹을 제기하며 검찰 수사를 의뢰했다. 그러나 2015년 2월 법원은 오세훈 전 시장에 대해 무혐의 판결을 내리면서 박영수는 한 차례 논란에 휘말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영수는 자신이 맡은 사건에서 법률적 판단을 내리며 중요한 법적 쟁점들을 다루었다.

6.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특별검사로 임명

 

2016년 박영수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특별검사로 임명되었고, 이 사건은 그에게 많은 주목을 받게 했다. 박영수는 박근혜 정부의 국정농단 사건을 수사하며, 삼성 이재용 부회장을 구속시키는 등 큰 성과를 이루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포항 가짜 수산업자 사기 사건에 연루된 의혹을 받으면서 사퇴하기에 이른다. 이 사건은 박영수에게 큰 논란을 일으키게 되며, 그가 지닌 정치적 입지에도 영향을 미쳤다.

7. 대장동 사건과 화천대유 연루 의혹

 

박영수는 2021년 대장동 개발 사업과 관련된 화천대유 사건에 연루된 것으로 알려졌다. 박영수는 당시 대장동 개발사업에서 민간업자들과의 부적절한 거래에 연루되었으며, 그에 대한 수사가 이어졌다. 이 사건은 박영수를 다시금 구설수에 올려놓았으며, 이후 검찰의 수사를 받았다. 검찰은 그가 대장동 개발사업과 관련해 200억 원의 금품을 수수한 혐의를 받고 있으며, 박영수는 이에 대한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8. 구속과 논란

 

박영수는 2023년, 서울중앙지검 반부패수사1부에 의해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상 수재와 청탁금지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다. 검찰에 따르면 그는 대장동 개발사업과 관련해 민간업자들의 청탁을 들어주는 대가로 금품을 수수한 혐의를 받고 있다. 그와 관련된 수사에서 11억 원의 대여금이 화천대유에서 제공되었으며, 이로 인해 그는 법적 책임을 지게 되었다.

박영수의 구속은 그가 대한민국 법조계에서 어떤 중요한 인물로 자리 잡았는지를 보여주는 한편, 그의 비리 의혹으로 인해 법조계의 신뢰성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의 구속은 법조계뿐만 아니라 정치계에도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후속 수사와 재판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모은다.

9. 결론

 

박영수의 생애와 경력은 복잡하고 논란이 많았다. 그는 검찰에서 재벌 수사와 강력한 법적 대응으로 '재계의 저승사자'라는 별명을 얻었고, 이후 변호사로서 활동하면서 정치적 입지를 다졌다. 그러나 그의 경력은 여러 번의 논란과 사건에 휘말리며, 대장동 사건을 포함한 여러 의혹에 연루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영수는 대한민국 법조계에서 중요한 인물로 남아 있으며, 그의 사건은 향후 법조계의 향방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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