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인, 운동선수, 정치인, 셀럽, 경제인, 교육자, 유명인, 인물,방송

남경필 : 제34대 경기도지사. 그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사람인물배우 2024. 11. 14. 10:01
반응형
남경필(南景弼)은 제34대 경기도지사로 재임한 정치인으로, 1965년 1월 20일 경기도 용인군 포곡면에서 태어났다. 경복초등학교와 경복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연세대학교 신학대학에서 사회사업학을 전공하고, 예일대학교에서 MBA 석사 과정을 마친 뒤 뉴욕대학교 대학원에서 행정학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정치 활동에 앞서 경인일보 사회·정치부 기자로 활동했으며, 이후 한나라당에서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어 정치 경력을 쌓았다. 그는 15대부터 19대까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와 병 지역구에서 여러 차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으며, 특히 한나라당의 원내부총무, 대변인, 상임운영위원, 최고위원 등을 역임하며 당내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반응형

남경필은 2014년 7월 1일부터 2018년 6월 30일까지 제34대 경기도지사로 재임했다. 그의 임기 동안 경기도의 다양한 정책과 개혁을 추진했으며, 도민의 삶의 질 향상과 지역 발전을 위해 힘썼다. 또한, 다양한 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가지며, 장애인 스포츠와 게임 산업 관련 단체의 회장직을 맡아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 외에도 경기도와 관련된 여러 위원회의 위원장직을 맡아 지역 사회의 발전에 기여한 바 있다.

 

경기도지사로서의 경력을 마친 후에는 J&KP홀딩스 대표이사, (주)포니링크 대표이사, 사단법인 은구 이사장 등 다양한 기업과 사회단체에서 활동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행사하고 있다. 현재는 국민의힘 경기도당 고문으로도 활동 중이다. 남경필은 또한 개신교 신자로서 종교 활동에도 참여하고 있으며, 가족적으로는 전처 이지와의 사이에서 두 아들을 두고, 이후 재혼하여 새로운 가정을 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경필: 대한민국의 前 정치인, 現 기업인  

남경필은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정치인이자, 현재는 기업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인물이다. 제15대부터 제19대까지 5선 의원을 지낸 그는 특히 제34대 경기도지사로서도 이름을 떨쳤다. 경기도지사로 재임한 동안 그는 지역 발전과 사회적 책임을 중시하며, 다양한 정책을 통해 경기도민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힘썼다. 하지만 정치인의 경력을 마친 후, 그는 정계에서 은퇴하고 기업과 사회 활동에 집중하는 방향으로 삶의 전환을 맞이했다. 남경필의 정치 여정은 단순한 정치인의 경로를 넘어, 가족과 지역, 그리고 개인의 신념이 얽힌 복합적인 이야기이기도 하다.

 

남경필은 수원의 유서 깊은 가문 출신이다. 그의 조부인 남상학은 경남여객을 창업해 가업을 이어온 사업가였으며, 아버지 남평우는 제14대와 15대 국회의원을 지낸 정치인이었다. 아버지가 급서한 뒤, 남경필은 유학 중에도 귀국하여 의원직을 세습하는 드문 사례를 보여주었다. 31세에 국회에 입성한 그는, 이후 5선 의원으로서 정치적 경륜을 쌓으며 한나라당과 새누리당 내에서 소장파로 활동했다. 그가 소속된 정치 집단은 친박이나 친이 진영과는 일정 거리를 두고, 비교적 중립적인 입장을 유지했다. 이는 그의 정치적 독립성과 신념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남경필은 경제적 자유주의와 시장 중심의 경제 모델을 지지하는 보수적 성향을 가졌지만, 동시에 실용주의적 접근을 강조하는 온건 보수주의자로 평가받는다. 특히 경기도지사로 재임하면서 연립정부를 직접 조직하는 등, 실용적이고 중도적인 정치적 태도를 취했다. 그는 "국민들이 먹고 사는 데에 진보와 보수가 어디 있느냐"며, 정치적 이념보다 실용적인 해법을 우선시했다. 또한, 군 복무에 대한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며, 모병제를 찬성하는 입장을 견지했다. 남북정상회담과 개성공단 재개에 대해서도 유연한 입장을 보이며, 햇볕정책을 지지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보수적 성향을 완전히 버리지 않았다. 이러한 정치적 포지션은 그를 둘러싼 다양한 논란을 일으켰으며, 일부 강경 보수층에서는 그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정치적 독립성과 실용주의적 접근을 통해 한국 정치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남경필: 5선 의원 출신, 경기도지사로서의 정치적 발자취  

남경필은 대한민국의 정치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로, 5선 의원과 제34대 경기도지사를 지낸 경력을 자랑하는 정치인이다. 그의 정치적 커리어는 단순히 장기적인 임기 동안 선출직을 맡은 경로를 넘어, 관례를 깬 파격적인 이력을 남겼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그는 국회의원 5선을 마친 뒤, 중도에 의원직을 사퇴하고 경기도지사 선거에 도전, 당선되었다. 사실, 대개 광역자치단체장에 출마하는 인물들은 3~4선의 의원이 많았지만, 남경필은 5선이라는 원로급 의원 신분으로 이 같은 정치적 결정을 내리며 정치적 전환점을 맞았다. 이후 5선 이상의 의원이 광역자치단체장에 당선되는 사례는 홍준표 대구광역시장 당선까지 없었고, 이 또한 7선 경남지사 재임 경험까지 고려하면 그가 남긴 정치적 이정표의 중요성을 더욱 부각시킨다.

 

남경필은 2014년 경기도지사에 당선된 직후, 개인적인 갈등을 겪었다. 그해 그는 부인과 이혼을 하게 되었고, 이에 대한 정치적 논란도 존재했다. 일부에서는 그의 이혼을 정치적 부담으로 해석하기도 했지만, 남경필은 이혼의 배경으로 정치적 압박과 개인적인 사정을 강조했다. 특히 MB 정부 시절의 불법사찰 문제와 관련해 부인의 스트레스가 크고, 경기도지사로서의 직무 수행에 있어 각자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다고 회고했다. 이혼 직후 그의 장남이 군대 내 폭행 사건에 연루되며 또 다른 논란에 휘말렸지만, 이 사건은 정치적 이혼 이슈를 잠시 가렸고, 남경필은 이를 통해 더욱 강한 정치적 입지를 다지게 된다. 2018년, 남경필은 다시 재혼하며 새로운 가정을 꾸리게 되었고, 이 결혼식은 극히 사적인 환경에서 이루어졌지만, 이전의 이혼에 대한 논란은 그의 정치적 이미지와 별개로 지나갔다.

남경필은 정치적 성향과 전략에서도 독특한 입지를 가지고 있다. 그는 보수적인 정치인임에도 불구하고, 민주당과의 연정에 있어 상호 존중과 협력의 자세를 보였다. 경기도지사 시절, 그는 고문 후유증으로 고통받는 민주화운동 유공자들에 대한 무료 진료를 시행하며, 야당의 의견을 수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그가 중도 실용주의적 접근을 통해 보수 정치 내에서 개혁적인 소장파로 자리잡았음을 보여준다. 또한, 남경필은 군대 문제나 안보 문제에 대해서도 자유주의적인 관점을 제시하며, 모병제를 지지하는 입장을 밝혀 논란을 일으켰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뚜렷이 하면서도, 다소 자유롭고 사교적인 성격으로 인해 진보 성향의 정치인들과도 두루 친분을 유지했다. 이러한 다양한 정치적 행보는 그를 민주당 지지자들에게도 인정받는 인물로 만들었다.

 

남경필의 선거 이력은 그가 정치인으로서 얼마나 강력한 입지를 구축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수도권 격전지에서 연이어 승리하며 6번의 선거에서 승리하는 기록을 세웠고, 이는 정치적 능력뿐만 아니라 그의 정치적 전략과 소통 능력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2018년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이재명에게 참패하면서 그가 쌓아온 연승 기록은 끝이 나게 되었다. 이외에도 남경필은 경기도지사로서 '청년통장' 사업을 둘러싼 이재명 시장과의 대립에서도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그는 '사행성 포퓰리즘'이라며 이재명을 강력히 질타했고, 이는 그가 도지사로서 정책적 입장을 확고히 한다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남경필은 "북경필"이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경기 북부 지역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지원을 약속하며, 자신의 정치적 존재감을 계속해서 드러내고 있다.

 

남경필의 정치적 이력은 그가 단순한 '금수저 정치인'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특권을 사회를 위한 봉사로 전환하려는 노력의 결과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같은 정치인들을 롤모델로 삼고, '노블레스 오블리제' 정신을 강조하며 자신만의 정치적 철학을 확립해 나갔다. 그의 정치적 외모와 스타일은 많은 사람들에게 인상적인 요소로 남아 있으며, 친근하고 차분한 이미지로도 정치계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그가 남긴 정치적 자취는 그가 얼마나 대중과 가까운 정치인이었는지, 그리고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정책을 실현하고자 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반응형